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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1099년 광신과 학살의 전쟁

[오늘의 경제소사] 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베르사유궁에 있는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을 표현한 그림./위키피디아

1099년 7월15일 새벽 2시, 예루살렘 성벽. 프랑크군이 총공격에 나섰다. 한낮 무렵 공성용 망루가 성에 닿았다. 북쪽 성루 점령으로 사실상 전투 종료. 기독교세력은 637년 가을 신흥 사라센에 빼앗긴 지 462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1095년 시작돼 1291년까지 이어진 9차례 십자군의 출발점인 1차 십자군은 종교적 열망이 강한 덕분인지 유달리 이적(異蹟)이 많았다. 안티오크(안디옥) 공성전에서 패전 직전, ‘거룩한 창’을 발견해 전세를 역전하고 예루살렘성 공격에는 죽은 성직자가 함께 싸운다고 여겼다.

예루살렘을 수복한 종교적 열망은 평화와 공존을 짓밟았다. 십자군은 남녀노소, 이슬람과 유대인을 죽였다. ‘예루살렘 전기’를 쓴 역사가 사이몬 몬티피오리에 따르면 엄마 품에서 빼앗은 아기의 머리를 성벽에 짓이겼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 ‘광신에 따른 야만 행위’라고 썼다. 수만명을 죽인 대학살은 1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수그러들었다.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십자군 병사들의 무릎까지 피가 찼다. 부패가 빠른 한여름 예루살렘에 퍼진 시체 썩는 냄새는 몇 달이 지나도록 빠지지 않았다.

무엇이 증오를 키웠을까.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고 믿었던 탓이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11월 군중들에게 ‘이교도와 전쟁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이다.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령 죽더라도 너희의 죄를 완전 용서받게 될 것’이라며 전쟁을 부추겼다. 카놋사의 굴욕(1077)으로 교황의 권세가 높던 시절, 국왕과 영주들은 창을 들었다. 이슬람의 잘못도 있다. 1094년 베두인 부족 독일과 네덜란드 순례자 7,000여명을 습격, 5,000여명을 죽였다. 분열된 이슬람권의 내부 통제가 약해지며 사단이 벌어졌다.

경제적 욕망도 십자군 전쟁을 달궜다. 노르망디 공작의 영국 정복(1066)을 지켜본 프랑스 영주와 귀족들은 앞다퉈 전장에 나서 원했던 바를 따냈다. 병력 열세였던 십자군의 승리 요인은 이슬람의 분열. 서로 견제하고 동족을 배신하기 바빴다. 예루살렘을 88년 뒤 쿠르드족 출신인 현군 살라딘에게 빼앗길 때 상황은 정반대다. 기독교 계열 왕국들은 분열된 반면 이슬람은 살라딘의 기치 아래 뭉쳐서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적을 맞아 뭉치기보다 헐뜯기에 골몰하는 사회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복수하지 않고 기독교들을 풀어주는 관용을 베푼 살라딘의 명성은 역사에 빛난다. 증오는 짧고 불편하지만 관용의 기억은 영원히 산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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