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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650살 은행나무에서 성리학의 향기가...

■나무로 읽는 역사- 나주객사 은행나무와 나주목사내아 팽나무
강판권 계명대 교수·사학과
배·곰탕·평야 떠오르는 나주지만
옛 위용 보여주는 객사 금성관엔
성리학 상징 은행나무 두그루 우뚝
금학헌엔 벼락맞은 500살 팽나무
액운 방지 속설에 사람 손길 이어져

전라남도 나주의 객사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객사 중에서도 매우 규모가 크다. 이는 나주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보여준다. 나주의 규모는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 명칭을 낳은 데서도 알 수 있다. 나주는 고려 현종 9년(1018년)부터 조선시대까지 나주목(羅州牧)이었을 만큼 전남의 중심 지역이었다. 나주객사의 이름은 금성관(錦城館)이다. 금성관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에서 딴 이름이다. 금성은 통일신라시대 말인 경덕왕 때 사용한 나주의 옛 이름이다. 금성관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오색인문학] 650살 은행나무에서 성리학의 향기가...
전남 나주객사 금성관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나이가 무려 650살에 이른다.

금성관의 또 다른 보물은 금성관 뒤편에 살고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다. 650살 정도의 은행나무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나무다. 성리학 공간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의 ‘행단(杏壇)’에서 유래한다. 행단은 살구나무를 심은 단을 의미하고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이기 때문에 강학공간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살구나무를 행단이라고 부르지 않고 은행나무를 행단이라 부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한다. 행단에 대한 중국과 한국 간 나무 종류의 차이는 우리나라에서 살구나무를 은행나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을 나무의 ‘문화변용’이라 부른다. 금성단의 은행나무도 문화변용에 해당한다. 은행나무는 중국 송나라 때 본격으로 사용한 이름이고 이전에는 오리발을 닮은 잎을 강조한 ‘압각수’라 불렀다.

금성관처럼 성리학 공간에 은행나무를 두 그루 심은 것은 이 나무가 암수딴그루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는 서울의 성균관을 비롯해 경북 영주 소수서원, 충남 아산 맹씨행단, 경북 청도 자계서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금성관 근처의 나주향교 대성전 앞에도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살고 있지만 아쉽게도 문이 닫혀 암수를 확인하지 못했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소철과 메타세쿼이아와 더불어 ‘살아 있는 화석’이다. 백악기부터 지구상에 살아남은 은행나무는 오로지 은행나뭇과 은행나무뿐이다. 더욱이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정방식으로 유명하다.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라서 암나무에는 암꽃이, 수나무에는 수꽃이 핀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암수가 마주해야만 열매를 맺는다거나 그림자를 보면 열매를 맺는다는 등 수정과 관련한 속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바람으로 수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마주하지 않아도 수정할 수 있다.

은행나무를 아는 사람 중에서 암꽃을 직접 본 경우는 아주 드물다. 단지 암나무에 열린 열매를 봤을 뿐이다. 은행나무는 상당히 많은 나이에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손자 대에 열매를 맺는 공작 지위를 가진 나무, 즉 ‘공손수(公孫樹)’라 부른다. 은행나무는 수나무의 정충(精蟲)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암나무 꽃과 수정한다. 수정하는 데만 3개월 정도 걸린다. 이 같은 수정방식은 지난 1896년에 일본의 식물학자 히라세 사쿠고로가 처음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280살 정도의 은행나무는 현재 도쿄대 이학부 부속식물원에 살고 있다.

은행나무와 더불어 금성관에서 눈길을 끈 것은 금성관 왼쪽에 딸린 유생 숙소인 벽오헌(碧梧軒)이다. 객사 내 숙소 이름을 ‘벽오’라 붙인 것은 유생들이 큰 인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벽오동은 봉황이 유일하게 앉는 나무이고 봉황은 큰 인물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금성관 오른편 담장 옆에 한 그루의 벽오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연꽃이 있어야 할 금성관 벽오헌 옆 연못에는 수련이 살고 있다. 연꽃은 성리학자들이 사랑한 풀이다. 성리학 공간에 연꽃을 심은 것은 중국 북송시대 주돈이의 애련설 때문이다.

금성관과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이다. 그는 1583년 46세 때 나주목사로 부임해 3년간 근무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선정 중 하나는 임씨와 나씨 간의 긴 송사 해결이다. 아울러 그는 순무어사 김여물이 나주에 파견돼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 만큼 강직했다. 김씨는 재임 시절 나주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현 경현서원)을 세워 동방오현 중 수현인 한훤당 김굉필을 모셨다. 금성관 근처에 위치한 나주목사내아 금학헌(琴鶴軒)에는 그가 숙박한 방이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서는 숙박도 가능하다.

[오색인문학] 650살 은행나무에서 성리학의 향기가...
나주목사내아 금학헌의 500년 된 팽나무.

금학헌에는 500살 정도의 느릅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팽나무가 살고 있다. 이곳의 팽나무는 1980년대에 벼락을 맞아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벼락 맞은 팽나무를 만지며 촬영한다. 벼락 맞은 나무를 만지면 자신에게 나쁜 기운이 오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는 벼락 맞은 나무가 모든 액운을 가져갔다는 믿음이다. 김씨가 나주목사 시절 지은 시를 모은 작품이 ‘금성록(錦城錄)’이다. 금성록의 ‘제목없음(無題)’에는 그가 나주에서 보낸 심정이 담겨 있다.

‘오색구름 사이에 미인의 집 있어서(美人家在五雲間)/ 백 년 함께하자는 약속 식지 않았지만(百歲芳盟結未寒)/ 한번 남쪽 오고 나니 소식이 끊겼기에(一落天南消息斷)/ 고개 돌려 바라보니 겹겹의 산이 막혀 있네(不堪回首隔重巒)’

금성관과 금학헌, 그리고 나주향교를 보기 전까지 필자에게 나주는 평야·배·고분·곰탕의 도시였다. 특히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본 후 곰탕만 먹고 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영산강 포구의 홍어거리에서 맛난 홍어를 먹었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에 쫓겨 보지 못한 송죽리 동백나무(천연기념물 제515호)와 상방리 호랑가시나무(천연기념물 제516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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