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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가나아트컬렉션展 1부
2014년 재단설립 후 첫 서울전시
김환기·구본웅·박수근·이수억…
미술사적 가치 품은 작품들 소개

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나혜석이 1929~30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별장풍경’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동틀 무렵 푸르스름한 분위기와 자연이 이루는 초록의 기운 속에서 붉은 집이 빛처럼 돋보인다. 전통건축의 곡선미가 감지되는 지붕과 2층 난간의 모양으로 미루어 한옥에 기반 한 절충식 집인 듯한데, 실재했던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혜석을 뜻하는 ‘H’와 나씨 성을 쓴 ‘R’이 서명으로 새겨진 나혜석의 1929년 무렵 작품 ‘별장풍경’이다. 교과서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적혔고 ‘신여성’이라 불렸던 그는 당시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부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이 역력한 그림에는 외국에서 경험한 독특한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구본웅이 1940년대에 그린 ‘여인좌상’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그 곁에는 구본웅의 1940년대 작품 ‘여인좌상’이 자리 잡았다. 친구 이상을 그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인(友人)’으로도 유명한 구본웅은 천재라 불린 화가다. 고개 숙인 인물상에서는 시대적 고뇌가 읽힌다. 옷차림으로 보아 비구니로 추정된다. 얼기설기 반복적인 붓질로 뒤 배경 속에 인물이 스며들듯 표현했는데 대상을 분해해 재구성하는 입체파 화가들의 경향이 엿보인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 해방과 전쟁을 겪은 후, 1956년에 박수근이 그린 ‘소금장수’는 앉아있는 여인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먹고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노상에 좌판을 깔고 앉았으나 물건 살 사람은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당시 사회의 무력함이 느껴진다.

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박수근의 1956년작 ‘소금장수’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오는 3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리는 가나문화재단의 ‘컬렉션’ 전시 중 1부 ‘한국 근현대미술’전이다.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는 오는 23일까지 2부로 ‘한국의 수묵 채색화’ 전시가 함께 열린다. 총 31명 작가의 100여 작품이 소개됐다. 가나문화재단은 가나화랑과 서울옥션의 설립자 이호재 회장이 “축적된 미술재(美術財)를 공익화 하고자” 지난 2014년에 설립했다. 상업화랑이 공익 성격의 문화재단을 만들고 미술관 건립 계획까지 밝힌 것은 국내 처음인 일이었다. 유럽의 경우 프랑스의 유명 화상(畵商)인 애드리앙 매그가 1930년대에 매그재단을 설립하고 1964년 매그미술관을 세워 작가를 발굴하고 지역 명소를 만든 사례가 유명하다. 스위스 출신 화상 에른스트 바이엘러는 1970년대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을 창설한 후 1997년에 바이엘러재단을 설립해 세계적 미술관까지 일궜다.

가나문화재단은 지난 2018년 제주도립미술관과 지난해 정읍시립미술관, 여수GS예올마루에서의 전시를 통해 소장품을 소개했다. 미술관이나 문화재단의 소장품은 운영철학과 맞닿은 것이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척도다. 전시작들은 시장에서의 선호도보다 미술사적 가치에 방점이 찍혀 있다. 30년 이상 미술품을 수집해 온 이 회장이 이익보다는 ‘의무’로 수집한 것들이며, 그의 선구안이 아니었다면 사라지고 흩어졌을 공산이 큰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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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의 1963년작 ‘고양이’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전시장 1층은 근대기 서양미술을 1세대를 중심으로 ‘시작과 절정’을 보여주고 2층 전시장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데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작가의 작품들을 재조명했다. 3층에서는 중요한 한국화가 3인으로 고암 이응노와 내고 박생광, 단색화로 더 유명해진 권영우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앞발을 내리눌러 등을 쭉 펴는 여유로운 몸놀림의 고양이의 목에서 금방이라도 갸릉대는 소리가 흘러나올 듯한 조각상은 요절작가 권진규의 유작이다. 희귀한 그의 유화 2점도 같이 걸렸다. 재단은 갑작스레 세상을 버린 권진규의 유작을 다양하게 확보하고 있다.

도상봉의 ‘광릉수목원’은 화가의 보기 드문 대형 풍경화다. 백자 화병에 다채로운 꽃을 그린 정물화로 유명한 도상봉은 인기화가였다. 잘 팔리는 그림은 집에 걸기 좋은 크기로 그렸으되, 작가적 도전과 실험성은 이 같은 대작으로 펼쳐보였다. 조선 시대 산수화 정신과 현대미술가들의 숲 그림을 연결하는 가교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도상봉의 보기 드문 말년 대작 풍경화인 ‘광릉수목원’(왼쪽)과 화가의 대표적 정물화 중 하나인 ‘백국’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이수억의 1954년작 ‘6.25동란’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여기 있었구나, 한국미술 '시간의 조각들'
청전 이상범이 1966년에 그린 ‘하경산수’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이수억의 ‘6·25동란’은 피난민 행렬의 비극적 상황을 보여준다. 피난 풍경은 김환기의 ‘피난열차’,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등도 있지만 현실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이수억의 그림은 기록화로도 충분하다. 전시를 돌아본 미술사학자 조은정 고려대 초빙교수는 “희귀성이 돋보이는 남관과 구본웅의 작품, 시대순으로 작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권옥연 작품 등 중요한 대목이 많은 전시”라며 “가격·시장논리와 상관없이 미술사에서 간직해야 할 것들을 소장하고 이를 통해 시대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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